[CKMC_Critic]새로운 시각으로 처음 만나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출처 : 네이버영화


2007년 데뷔한 내 첫 작품은 농구만화였기 때문에 댓글로 ‘슬램덩크’와 비교를 많이 당했다. 그리고 누군가 "난 슬램덩크보다 이 만화가 더 잘 그린 것 같다"는 댓글을 달았고, 참다못한 나는 "님 슬램덩크 안보셨죠?"라고 대댓글을 달았다. 슬램덩크 모욕은 참을 수 없다.

내 데뷔작의 주인공은 키가 작고 기술이 좋은 포인트가드였다. 우월한 피지컬을 가졌지만 농구 기술은 미숙했던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와 정반대로 설정한 것이었다. 그만큼 나에게 슬램덩크는 데뷔 후에도 계속해서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나만큼이나 슬램덩크가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자신이 슬램덩크 세대라고 말하는 이들의 연령대도 대단히 넓게 형성되어 있는데, 1990년 연재를 시작해서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1996년 완결할 때까지, 그러니까 연재 시기 이 작품을 접한 사람은 모두 자신을 슬램덩크 세대로 규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토록 슬램덩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이 작품은 몇 가지 미련을 남겼다. 산왕전 승리 후 ‘이어지는 3회전에서 거짓말처럼 참패를 당했다’는 나레이션으로 북산의 전국대회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었고, 다음 시합에서 만나게 될 지학의 별 마성지나 그만큼이나 의미심장하게 등장했던 대명고교 4번 이현수, 명정공업 김판석이 전국대회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기대와 달리 작중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연재 당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의 완성도는 원작에 비해 많이 아쉬웠고, 그마저도 작품의 클라이막스인 산왕전을 다루지 못하고 끝나버린 것도 팬들에겐 아쉬움으로 남았다. 완결 후 26년 만에, 그것도 원작자가 각본과 감독을 맡아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고 밝혔을 때, 그리고 그 내용이 산왕전임을 알게 된 팬들이 환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극장판의 제목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강백호에서 송태섭으로 옮겨간 것이다. 원작 완결 후 이노우에는 주간 영 점프를 통해 ‘피어스’라는 단편을 선보인 적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 다룬 송태섭의 과거사를 극장판으로 가져와 산왕전의 경기 장면과 교차하여 보여준다.

슬램덩크는 북산고 스타팅멤버 뿐 아니라 벤치의 교체 선수들과 다른 학교 선수 등 다양한 캐릭터가 인기를 얻었던 작품임에도 각 인물들의 과거사나 가족사가 밝혀진 적은 극히 적다. 정대만의 과거가 상대적으로 많이 다뤄졌고 강백호의 아버지 이야기가 잠시 드러난 정도일까.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동경했던 형의 죽음과 이에 따른 죄책감을 극복하는 송태섭의 서사를 통해 대사 하나 하나, 컷과 페이지 단위로 모두 외우고 있던 산왕전의 경기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고교생이 되면 최강 산왕을 이기겠다는 꿈을 꾸던 형을 떠올리며 송태섭은 그가 남긴 손목 아대를 차고 경기에 나선다. 운동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야 모두 승리를 열망하겠지만 그 이유에 공감할 때 관중은 더욱 손에 땀을 쥐고 시합을 응원하게 된다. 농구 선수로서는 작은 키, 아버지와 형의 부재 등 많은 압박 속에서 살아온 태섭이 산왕의 존 프레스를 뚫고 돌격대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때 다 알고 있는 장면임에도 “그렇지!” 하고 주먹을 쥐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작을 사랑하는 팬들이 기억하고 있던 몇 개의 장면은 생략되었다.

강백호의 성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던 “정말로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장면이나 “진흙 투성이의 가자미가 되어라” 장면이 사라진 것이 대표적인데, 이번엔 송태섭의 시각에 집중하고 극장판의 상영 시간 안에서 경기가 늘어지지 않게 묘사하려는 감독 이노우에의 의지가 느껴져서 딱히 아쉽진 않았다.

생략된 장면보다 인상적인 건 송태섭의 매치업 상대였던 이명헌보다 같은 학년인 정우성을 라이벌로서 더 조명해준 점이다. 원작에서도 정우성은 세계관 최강의 기량으로 그 윤대협조차 (이름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도) 인정하고 있는 최고의 선수였지만, 에이스로서 서태웅이 넘어야 할 벽으로 묘사되었고 송태섭과는 관계성이 거의 그려지지 않았다. 극장판에서는 무패의 천재가 북산을 상대로 첫 패배를 경험하고 성장하는 모습으로 정우성이 그려진다.

 

원작 ‘슬램덩크’는 천둥벌거숭이 강백호가 팀의 승리를 위해 화를 참아내고 그토록 싫어하는 서태웅과 패스를 주고받는 스포츠맨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였다. 시점이 바뀌었지만 형의 부재를 극복하는 송태섭과 패배 후 복도에서 오열하는 정우성을 통해 이노우에는 같은 시합에서 백호 뿐 아니라 모두가 한걸음씩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강백호의 시각으로 경기를 바라볼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으로 처음 만나는 슬램덩크다.

관객들이 침도 함부로 삼키지 못하고 숨죽이며 보게 만드는 경기 후반부 무음의 클라이막스 묘사는 “아, 그 시절 이노우에 다케히코 머릿속에 있던 장면을 함께 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 장면은 원작에서도 극장판에서도 최고의 결정적 장면 연출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더빙판과 자막판을 둘 다 봤는데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자막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감독으로서 비난을 감수하고 성우를 모두 교체한 이유에도 공감할 수 있었다. 자막 읽느라 화면을 놓친단 이야기도 있었지만 내용은 다 알고 있었으니까. 음성은 ‘사쿠라기!’라고 부르는데 자막엔 ‘강백호!’라고 나오는 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으니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를 수는 있겠다.

그래서 "자막판, 더빙판 중 어떤 걸로 보란 말이냐" 묻는다면, 둘 다 보시면 됩니다.


양세준(만화가, 웹툰만화콘텐츠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