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선구자
정희경 선생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애민사상을 실천한 신앙인, 교육자, 정치인으로서, 근현대 대한민국 발전의 역사 맨 앞에 서서 비전을 제시하며 헌신하셨습니다.
교육의 길을 걷다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사범대학을 거쳐 미국 유학을 마치신 정희경 선생은 1961년부터 교단에 섰습니다.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 교육의 미래를 밝혔습니다. 이후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현대고등학교, 계원예술고등학교의 교장을 역임, 교육현장 한 가운데 투신하여 진정한 교육의 길을 개척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내셨습니다.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 교유들과 함께해방과 6.25 전쟁을 지나는 불우한 시대 속에서도 선생은 배움의 열정을 놓치지 않았다.
1950년대 미국 유학 시절선생은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미국 국무성 장학금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55년 유학길에 올랐다.
성균관대학교 여학생처장 시기선생은 당시 만 34세의 최연소 처장으로, 여학생들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였다.
이화여고 교장실에서선생은 1971년 38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사립 여자고등학교의 최연소 여자 교장이 되었다.
나라를 위해
1972년, 선생은 남북적십자회담의 유일한 여성 대표로 평양을 방문하셨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여성의 사회 참여와 국가적 역할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1996년에는 제15대 국회위원으로 선출되어 국회를 중심으로 교육 개혁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1971년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1953년 정전 이후 남북이 가진 첫 예비회담에서 선생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여성 대표로 선정되었다.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 남한 대표인 선생을 환영하는 북한 어린이1972년 9월 3일 주간조선 기사 1면으로 사진에는 선생이 "우리 수형이 닮았구나!"라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판문각에서1971년 9월에 시작한 예비회담은 막을 내린 12월까지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씩 이루어졌다.
당에서 발언 중인 선생의 모습선생은 1996년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1번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더 좋은 학교를 꿈꾸다
1996년, 배우자인 청강 이연호 선생과 함께 청강문화산업대학교를 설립하여 과잉 경쟁의 시대에 내몰린 이 시대 청년들이 더불어 나누고 참여하며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할 수 있는 참된 교육과 학교를 꿈꾸셨습니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는 국내 최초로 '문화산업'에 특화된 대학으로, 한국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2006년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개교 10주년 귀빈들과 함께선생은 개교 당시 생소한 분야였던 '문화산업'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개교 10주년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비 건립 기념식수선생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가 안병원 선생 등 귀빈들과 기념 식수 행사를 하고 있다.
공식석상에서 딸 이수형 학장(현 학교법인 청강학원 이사장)을 격려하는 선생1996년 설립자인 청강 이연호 선생의 타계 이후, 모녀는 이사장과 학장(총장)으로 청강문화산업대학교의 기틀을 다져왔다.
2014년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선생딸인 이수형 학교법인 청강학원 이사장은 어머니를 '슈퍼우먼으로 산 나의 롤 모델'로 회고한다.
나눔과 섬김의 실천
2000년대 이후에도 선생께서는 (재)대한 YWCA후원회 회장, 일가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시며 사회 곳곳에 나눔과 섬김의 정신을 심으셨습니다. 정희경 선생의 삶은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적 안목, 끊임없는 도전 정신, 약자를 향한 따뜻한 배려, 그리고 화합과 소통을 중시하는 포용의 리더십은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